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과정은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적 압박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중반부터 앗시리아 제국의 확장 정책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시기 앗시리아는 중동 전역에서 강대국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앗시리아 왕 티글랏-필레세르 3세는 북이스라엘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여 그들에게 조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는 기원전 734년부터 732년 사이에 북이스라엘의 일부 영토를 정복하고, 이 지역을 앗시리아 속주로 만들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는 앗시리아에 저항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티글랏-필레세르 3세에게 굴복해야 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여전히 앗시리아의 속국으로 남아 있었고, 조공을 바치면서 살아남았다.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앗시리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응해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는 군대를 보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켰고,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북이스라엘의 패배는 앗시리아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적 통제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앗시리아는 정복한 지역에서 강제 이주 정책을 펼쳤다. 사르곤 2세는 북이스라엘 주민들을 앗시리아 제국 내 다른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그 자리에 다른 정복지에서 데려온 이방인들을 정착시켰다. 이를 통해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반란의 가능성을 줄이려 했다. 이러한 강제 이주 정책은 제국 내 여러 민족을 혼합시키고, 정복된 지역에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앗시리아는 정복한 지역에서 조공을 요구하는 정책을 지속했다. 처음에는 북이스라엘도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면서 속국으로 남아 있었으나, 반란 이후에는 앗시리아의 직접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앗시리아는 정복한 지역에 관료들을 파견해 세금과 자원을 수탈하고, 정복지의 경제적 가치를 제국의 중심부로 옮겼다. 이를 통해 앗시리아는 제국 내에서 강력한 통치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복된 지역에서는 또한 앗시리아의 문화적 동화 정책이 작동했다. 정복민들 사이에서 인종적, 문화적 혼합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함으로써, 북이스라엘과 같은 지역의 민족적 정체성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북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는 이주민들과 혼합된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는 이후 사마리아인들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앗시리아의 군사적 승리와 정복 이후의 통치 정책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속화시켰고, 이로써 이스라엘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